- TV와의 이별에도 준비기간 필요하다
- 뽀로로는 안경빨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아이들은 아빠의 그 심오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 그 원인은 먼저 없애는 과정에서 아이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일방적이었으며, 또한 아이들의 마음에서 TV와의 이별 준비기간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필자의 집은 어떻게 없앴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거실에 있던 TV는 부엌으로 옮겼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 시청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과 사전에 회의를 했으며 과다한 시청시간을 인정하고 이동에 동의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저 부엌으로 이동시켰을 뿐인데 시청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이젠 아이들의 시청시간이 1/3로 줄었다. 가장 큰 이유는 좌석의 불편함이다. 거실에서는 소파에서 앉아 보다가, 내려와서 보기도 하며 또는 업드려 보다가, 딩굴면서도 시청을 했지만 부엌이란 공간은 딱딱한 의자와 식사시간이 있기에 오래 보기가 늘 어려웠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TV를 없앨 기회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열었고, TV를 치우고 그 공간에 서재를 만드는 안건을 토의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였고 찬성을 한다. 그래서 무쇠는 뜨거울 때 치라고, 즉시 아내는 책장을 구입했고, 날을 잡아 서재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동안 각 방에 있던 많은 책들을 모두 거실로 옮겼다. 그랬더니 거의 거실 한 면이 책으로 꽉 차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작은 책상과 의자도 구입했다. 그래서 서재 앞에서 쉽게 책을 꺼내서 읽기 쉽게 했다. 아이들은 서로 자신의 책을 좋은 자리에 놓으려고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딸과 대형문고에 가서 책을 사준다. 작년 기억으로 5번 정도 함께 갔다. 이렇듯, 딸이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거실을 서재로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TV가 아이의 인성과 공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유해성과 유용성이 상존하고 있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나치면 모자란만 못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먼저 TV에 대한 속성을 보면 무엇보다 일방적인 정보의 제공이며 우리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TV를 일명 바보상자라고 한다. 또한 아이가 유아인 경우, 지나친 시청은 자폐증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유아의 경우, 뇌가 매일 쑥쑥 자라고 있으며, 전두엽, 두정엽, 후두엽이 외부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는 곧 아이의 어린 시절, 상방향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교감, 상호작용, 배려, 인사법, 자신감 등 다양한 인성의 형성에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내 아이를 정말 훌륭하게 키우려면 TV에 대한 의존감보다 엄마와 아빠와의 놀이를 통한 인성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 그럼 TV는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최선의 방법은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속출한다. 물론 필자의 방법도 벤치마킹을 한다면 유용하다. 만일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할까? 방법이 없을까? 있다. 고장을 내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친구가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어느 날, TV를 고장을 낸다. 중요한 부품 1개를 뺀다. 하지만 아이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고장이 났다며 아빠에게 고쳐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러면 아빠도 그 말에 동의를 하고, 시간이 나면 고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차일피일 미룬다. 어차피 고장이 났으므로 볼 수가 없고 아이는 점점 TV에 관심이 줄어든다. 그 후, 한 달이 지나서 TV를 없앴다. 그랬더니 아이가 한 번 TV가 어디갔냐고 물어봐서 수리를 맡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젠 아이도 TV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게 TV는 아이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더 이상 찾지도 않았다. 일종의 이별을 위한 준비과정을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마음에서 TV를 지운 사례다.
 
차선책은 TV의 시청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될 것 같지만 함정이 많다. 그래서 우선 사전조치가 필요한데 가족회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중과 주말을 나누어서 시청시간을 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포스터다. 거기에 주중과 주말에 시청 시간을 각각 적는다. 그리고 거실과 주방과 아이의 방에 붙여놓는다. 바로 서로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굳은 맹세의 증표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 규칙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빠가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데 시청 금지시시간이다. 그러나 아빠는 꼭 보고 싶다. 이럴 때, 아빠가 아이에게 한번만 야구를 보고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시청을 한다. 그리고 아빠는 만족한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다. 아이가 시청 금지 시간임에도 보려고 떼를 쓴다. 그 이유를 아빠가 아이에게 물었더니 “아빠, 오늘 뽀로로 하는데 이번만 보고 다시는 안볼께요”라고 한다. 그러면 아빠는 자신이 먼저 약속을 어긴 전과(?)가 있기에 아이에게 야단을 칠 수 있는 명분이 상실된다. 그렇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아이는 부모의 따라쟁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이는 늘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따라한다. 규칙의 속성은 우선 누구나 지켜야 하는 평등함에 있다. 그러나 누군가 한 번 깨버리면 누구도 그 규칙에 대하여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 필자는 다시 TV를 살까 목하 고민중이다. 가족은 5명인데 아내도 바쁘고, 대학생 딸도 바쁘고, 모두 바빠서 함께 밥을 먹기도 힘들다. 오히려 TV를 사면 가족의 얼굴을 좀더 자주 볼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아이가 유아인 경우, TV의 시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상호작용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하는 동안 모든 것을 따라하면서 학습한다. 그러면서 언어도 발달하고, 예의도 배우고, 자신감도 배운다. 우리는 자칫, 유아영어에 절실함을 보이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정작 아이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양한 인성의 형성이다. 그 것의 중심에는 바로 엄마와 아빠가 있다. TV란 개념이 놀아주기 힘들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놀거리로서의 TV가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사물과 환경을 익히고 지식을 배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글:권오진/아빠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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